2020/05/18 02:48

[아끼는음반 19] 경외감마저 드는 드뷔시 전집: 다니엘 에리쿠르 아끼는 음반/음원



다니엘 에리쿠르의 유일한 녹음으로 알려진 이 드뷔시 피아노 독주곡 전집(1960-62년 녹음)은 그냥 마음에 드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음반입니다.  제가 그동안 접한 모든 피아노 음반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을수 있는 음반이에요!

에리쿠르의 터치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선명한 동시에 다채로운 톤 컬러를 지녔으며, 한치의 오차 없는 정밀한 핑거링과 폭넓은 스펙트럼의 강약 컨트롤 그리고 소리가 절대 뭉개지지 않는 절묘한 페달링은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게다가 눈부시게 매혹적인 이 모든 음들이 정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냥 아름다운 음색을 늘어놓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매 순간이 확신에 차있고 구심점이 확실한만큼 아무리 길고 느린 곡도 늘어지는 법이 없으며, 템포를 순간순간 미묘하게 흔들면서도 리듬이 탄력이 넘치고 구조가 견고합니다.  모든 연주가 너무 좋지만 특히 영상 I, II권, 판화, 베르가마스크, 피아노를 위하여, 어린이 차지, 그리고 각종 소품들은 앞으로 과연 이에 필적하는 연주가 나올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율적인 명연입니다.


판화 전곡 (1961년 봄 뉴욕에서 녹음)


영상 I권 중 1곡 물에 비친 그림자 (1961년 봄 뉴욕에서 녹음)


기쁨의 섬 (1962년 봄 뉴욕에서 녹음)


흥미롭게도, 드뷔시의 작품 중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주곡 I, II권과 연습곡집의 경우 에리쿠르 연주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살짝 덜한데, 그 주된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각 구성곡의 포스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들에선 이상하리만치 템포를 심하게 밀고당기는 모습도 보이고요).  개인적인 취향상 드뷔시의 전주곡집과 연습곡집은 왠지 다소 무심한 듯한 감성이 깃들어있는 연주를 선호하는데--전주곡은 기제킹의 1930년대 녹음, 연습곡은 제이콥스의 1975년 녹음이 제 선택입니다--에리쿠르는 곡 하나하나의 생명력과 존재감이 너무도 뚜렷하게 꿈틀댑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다른 작품들의 연주가 워낙 압도적이라 저의 최애 음반 중 하나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습니다.

에리쿠르에 대해 처음 알게 된건 약 3년전쯤 티스토리의 한 블로그를 통해서였어요.  구글에서 드뷔시 에리쿠르로 검색하면 금방 찾으실 수 있고 이 음반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 전반에 걸쳐 글쓴분의 깊은 내공이 묻어나는 심도있는 포스팅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1903년 12월 12일 파리 인근 조시니에서 태어난 에리쿠르는 15세에 파리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했는데 재학 당시 드뷔시와 가깝게 지내면서 자선 콘서트에서 드뷔시와 함께 연주도 하고 첼로소나타 초연시 악보도 넘겨주고 딸 슈슈와도 종종 같이 놀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육군에서 18개월 의무복무를 마친 후 23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고 1957년부터는 피바디 음악원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무려 92세까지 연주활동을 이어간 에리쿠르는 특히 프랑스 및 스페인 음악의 해석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1998년 6월 21일 아내와 가까운 친구 두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에리쿠르는 이 음반 외에는 다른 녹음 기록이 전혀 없어요.  유툽에도 이 음반과 동일한 소스의 클립만 몇개 올라와 있을뿐 방송용이나 개인 녹음 등 비정규 녹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슈만, 쇼팽(특히 마주르카), 라벨, 알베니스, 모차르트 등을 녹음으로 남겼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신체적 능력과 축적된 음악철학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었을 50대 후반에 이런 음반을 남겨주었다는 것만 해도 사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기서 제가 추가로 할수 있는 덕질은, 자필 서명이 들어간 연주회 프로그램을 입수하는 것이겠죠 ㅎㅎ



핑백

  • 溫音 : 아끼는음반/음원 (My Hall of Fame) 2020-05-18 02:50:41 #

    ... solo Piano, complete - Daniel Ericourt (1960-1962)드뷔시: 피아노 독주곡 전곡 - 다니엘 에리쿠르 (1960-1962) 포스팅으로 가기 Debussy: Preludes, Books I & II - Walter Gieseking (1938-1939)드뷔시: 전주곡 I, II권 - 발 ... more

덧글

  • Mirabell 2020/05/23 12:26 #

    강추하시길래 요 앨범... 샀습니다. 좋은 앨범 감사합니다!! 이따 집에 와서 연주하신 마주르카 들어볼게요!
  • trammondog 2020/05/24 02:55 #

    제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 몇년전 절판되어 구하기 쉽지 않은데 득템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 songyee Choi 2020/06/03 15:41 #

    드뷔시의 곡을 구석구석 다 알진 못하는데요
    기쁨의 섬은, 이런저런 연주자의 것들을 들어봤어요.
    왜 제목과 달리 연주들이 "신비의 섬" 처럼 들리는 건지 갸우뚱 하다가, 아믈랭의 연주를 듣고 오 괜찮다.. 했었는데
    그런데 이분의 연주를 들으니 알겠네요.
    이런 연주는 처음 들어봐요!
    원래 이곡이 이렇게 연주되어야 하는 거였다고
    그리고 기존 해석들 마냥 두려움 신비함이 섞이지않고
    순수히 설레는 기쁨이랄까요 정답처럼 눈에 보이듯
    연주하네요.
    trammondog님 해설을 보며 끄덕 끄덕 했습니다.
    덕분에 -어쩌면 너무 거저- 훌륭한 연주자를 알아갑니다.
    친필사인 득템 하신거 축하해요^^ 기쁘시겠어요

    (trammondog님 마주르카 연주도 들어봤음다.
    간만에치시는거치곤 너무 실력자이신데요..? )
  • trammondog 2020/06/04 02:28 #

    에리쿠르 좋게 들으셨다니 반갑네요 :) 드뷔시 들을때 몽환적이거나 흐릿한 것보다 명쾌하고 직선적인 연주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 기준만으로 보면 가장 부합하는 피아니스트가 졸탄 코치슈였어요. 그런데 코치슈 연주들이 많이 그렇듯 대단한 연주라고 감탄은 하는데 마음에 와닿는다고 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거든요. 그러다가 에리쿠르를 알게 돼서 이렇게 친필사인까지 모으고 있네요 ㅎㅎ;

    호르몬과 에로티시즘이 넘치는 기쁨의 섬은 신비롭거나 관념적인 것과는 특히나 거리가 있는거 같아요. 드뷔시에게 영감을 준 미술작품을 봐도 그렇고(https://imslp.simssa.ca/files/imglnks/usimg/9/96/IMSLP609433-PMLP5499-L'isle_joyeuse.pdf), 곡을 수정해서 완성한 상황을 봐도 그렇고요(부인을 두고 유부녀와 눈이 맞아 섬으로 밀회 여행을 떠나있었죠). 에리쿠르 연주가 마음에 드셨으면 혹시 라로차의 실황연주는 어떠실지 궁금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2AjUQ2Ye180

    마주르카는 뻣뻣해진 손가락과 손목을 억지로 돌려가며 연습했는데 분에 넘치는 칭찬 감사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