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9 03:16

다소 잘못 알려진 이야기: 슈만의 카르나발 작곡 배경 음악 기타



요즘 슈만의 전기(링크)를 읽으면서, 극심한 우울증과 투신 자살 시도의 이미지로만 대표되는 슈만이 아니라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편지 및 일기를 바탕으로 보다 사람 숨결이 느껴지는 슈만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카르나발의 작곡 배경에 관해서는, 귀족(폰 프리켄 남작)의 딸 에르네스티네가 비크의 집에 기숙하며 음악을 배우러 왔다가 슈만과 사랑에 빠지고, 비크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폰 프리켄이 격노하여 딸을 데려가 버리면서, 슈만은 실연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켜 걸작 카르나발이 탄생했다.. 정도의 내용이 꽤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저도 지금까지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 전기를 읽으니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더군요.


1) 에르네스티네는 원래부터 몇 달만 머무를 계획으로 1834년 4월 21일 라이프치히의 비크 집에 도착했고, 9월 1일 폰 프리켄이 데리러 온 건 격노해서가 아니라 그냥 일정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비크는 슈만과 에르네스티네의 교제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클라라의 새엄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해 둘에게 대부모(godparents)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요. 또 비크가 폰 프리켄에게 쓴 편지는 둘의 관계를 폭로하거나 일러바치는 목적이 아니라 제자인 슈만을 적극 칭찬하며 추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어 편지에서 발췌해 영역한 부분(책 99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How much I would need to write in order better to describe this somewhat moody, headstrong, but noble, excellent, fanciful, highly gifted composer and writer Schumann to you, possessed of the deepest feeling and exceptional talent."
(좀 변덕스럽고 고집 센 면은 있어도, 슈만은 고상하고 뛰어나며 풍부한 상상력과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작곡가이자 기고가입니다. 심오한 감성과 훌륭한 재능을 겸비한 이 젊은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제대로 된 소개가 될지 모르겠네요.)


3) 비크의 편지를 받은 폰 프리켄도 둘의 관계에 대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마추어 플루티스트였던 그는 자신이 쓴 주제와 변주곡을 슈만에게 보여주며 길게 의견을 교환했고 슈만은 이 곡의 주제를 나중에 교향적 연습곡의 주제로 사용하기도 했고요. 폰 프리켄은 9월 에르네스티네를 아슈(Asch)로 데려오고나서 바로 10월에 슈만을 초대했고, 그 직후 폰 프리켄과 부인은 둘의 약혼과 결혼을 정식으로 허락하기로 합니다.


4) 그런데, 여름까지만 해도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A, S, C, H를 음악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메모를 남기면서 사랑이 활활 불타올랐던 슈만은, 9월 에르네스티네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10월에 아슈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보다 에르네스티네의 애정이 더욱 뜨거운 불균형 상태라는 걸 알게 됐고,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에르네스티네와의 관계를 "this summer-novel"(여름처럼 지나가는 소설)로 표현하죠. 슈만은 12월에 아슈를 두 번째로 방문한 후 카르나발을 쓰기 시작합니다.


5)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의 애정 불균형은 더욱 심각해지는데--에르네스티네가 매주 두 번씩 슈만에게 편지를 쓸 때 슈만은 잘해야 두 달에 한 번 답장합니다--그래도 1835년 여름까지는 둘 사이의 결혼 계획이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슈만이 아마도 결혼을 통한 안정과 귀족 집안의 사위로 누릴 경제적 혜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추측입니다. 참고로 슈만은 당시 25세, 에르네스티네는 18세, 클라라는 15세였는데, 클라라는 슈만에 대한 애정과 에르네스티네에 대한 질투를 드러내기 시작한 반면 아직 슈만은 7년간 오누이처럼 지내온 클라라를 계속 귀여운 여동생 정도로만 대하고 있었습니다.


6) 그러던 중 1835년 여름 어느날, 슈만은 에르네스티네가 사실 폰 프리켄의 처제와 공장주 사이에서 혼외로 태어난 딸로 폰 프리켄이 입양해서 데리고 있었으며, 결혼하더라도 지참금을 받을 수 없고 추후 상속인 지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슈만이 그나마도 갖고 있던 결혼에 대한 기대의 불씨는 이로써 완전히 꺼진 것으로 보입니다. 클라라는 당연히 이를 반겼는데, 공교롭게도(?) 슈만이 클라라를 바라보는 눈길도 이 시점부터 바뀌기 시작하고 둘은 마침내 11월, 첫 키스를 나눕니다. 한편 에르네스티네와 클라라를 상징하는 곡을 비롯해 총 21곡으로 이루어진 카르나발은 1835년 완성되고 에르네스티네가 아닌 폴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카롤 리핀스키에게 헌정됩니다.


7) 1836년 1월 1일, 에르네스티네는 슈만의 정식 파혼 편지를 받습니다. 여전히 슈만을 사랑하던 에르네스티네는 (예고되었던) 이별 통보에 크게 상심했지만 의연하게 대처했고, 무엇보다 몇 년 후 비크가 법정 싸움에서 슈만에게 불리한 증거를 동원하고자 안간힘을 쓸 때에도 슈만과의 약혼 사실을 끝까지 증언하지 않으면서 슈만과 클라라에 대한 의리를 지킵니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슈만은 1841년 3곡의 노래를 에르네스티네에게 헌정합니다.


아직 책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이 밖에 클라라와의 연애사에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좀 다른 뒷얘기도 있고 그렇습니다. 역시, 다면적이고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한두 마디로 압축하다보면 이미지가 지나치게 숭고하게 또는 낭만적으로 왜곡되어 전파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