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3 05:59

[아끼는음반 16] 슈만 다비드동맹 무곡집: 주샤오메이 아끼는 음반/음원

슈만 자신의 내성적이고 조용한 자아 오이제비우스를 상징하는 6곡, 외향적이고 다혈질인 자아 플로레스탄을 그린 7곡, 그리고 둘의 모습이 교차되는 5곡, 이렇게 18곡이 모여있는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작품번호는 6이지만 실제로는 카르나발 Op. 9나 교향적 연습곡 Op. 13보다 나중에 작곡했습니다. 슈만 피아노곡 대다수가 자신 내면의 이상, 환상, 모순, 갈등을 그리고 있는 가운데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그 중에서도 슈만이 자신을 가장 vulnerable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슈만을 좋아하게 된 이후로 한동안은 탁월한 테크닉으로 무장하고 유창한 어조로 곡을 정면돌파하는 스타일을 선호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슈만 특유의 '애매함'이나 '해결되지 않고 남는 듯한' 느낌을 마지막에 가서는 매듭을 짓고 막을 내리는 연주, 모음곡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이 쉽게 들리는 연주를 원했던 것 같아요. 제 기준에서 여기 해당되는 피아니스트라면 리히터, 호로비츠, 에고로프, 아믈랭, 반필드, 폴리니 등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테크닉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각 곡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연주, 그리고 짧은 각 곡들이 뚜렷한 지향점 없이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연주도 좋아하게 됐어요. 더 나아가 일부 작품은 오히려 그런 연주를 선호하기에 이르렀는데, 주샤오메이의 다비드동맹 무곡집이 그 예입니다.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코르토의 1937년 녹음 외에는 마음에 드는 게 한동안 없다가 주샤오메이 음반을 두 번째 듣던 날 완전히 그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샤오메이에 대한 소개는 자전적 에세이 한국어판에 대한 소개글 링크로 대신합니다: 클릭

주샤오메이는 몇 차례에 걸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에서, 각 곡을 주조하거나 연결시키려는 의지를 내세우는 대신 각 곡이 각자 살아 숨쉬도록 공간을 열어두면서 결국에는 느슨하지만 헐겁지 않게 전체를 아우르는 능력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여기 다비드동맹 무곡집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곡에 으레 둘러지는 시간적, 구조적 울타리를 아예 걷어내고 격렬한 악구는 더 격한 어조로, 느린 악구는 더 고즈넉하게 노래하도록 공간을 확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각 곡을 전체 흐름의 맥락에서 매끈하게 뽑아내는 연주에 익숙해져 있다면 주샤오메이의 연주는 구조가 퍽 산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 음반을 들은 첫날 밤 제가 받은 인상이 그랬어요. 게다가 주샤오메이가 요즘 대다수의 피아니스트들처럼 어릴 때부터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으로 기교를 치밀하게 연마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그 결과 테크닉 면에서 약간 어눌한 인상을 감출 수 없는 터라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음반을 두 번째로 들을 때부터는 그 산만함과 어눌함이 활짝 열린 개방성과 각 곡의 독립적인 생명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지금까지는 제14곡(Zart und singend; 부드럽고 노래하듯이)을 들을 때 참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앞뒤 곡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무의식중에 헤아리고 있었는데 주샤오메이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에 오직 이 곡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슴 시리게 연주합니다. 이렇게 18곡 각각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서 한껏 어루만지는 거죠. 그러면서도 마지막 제18곡(Nicht schnell; 빠르지 않게)에 가서는 그동안의 모든 장면을 쓸쓸히 회상하며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워낙 명곡인 게 크지만,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이 정도로 청자를 사로잡고 감정을 고양시키는 주샤오메이의 연주도 설득력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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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음반 해설지에 있는 주샤오메이의 인터뷰도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어린이 정경과 다비드동맹 무곡집이 개인적으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어린이 정경 덕분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제 운명도 음악인으로 결정됐죠. (웃음)


어떻게 처음 접하셨나요?
3살인가 4살 때 베이징 아파트에 살 때였는데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폭풍이 치던 날 저녁에 외출할 수 없게 된 어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트로이메라이를 쳐 주셨는데 저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가 그 순간 피아노를 치고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음을 알게 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린이 정경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경험이었다고 하셨는데 어린이 정경이 사실 어린이들이 듣기에는 어렵지 않나요?
맞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죠. 슈만 본인도 '어른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다른 어른들을 위해 쓴 작품'이라고 설명했고요.
이 작품에서 정말 '어린이다운' 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슈만은 호기심, 무서움, 조바심, 행복, 우울함 등 어린 시절에 느끼는 중요한 감정들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포착했어요. 장난스럽기도 하고 조르기도 하고 공상하기도 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겁니다.
특히 Glu"ckes genug(완전한 행복)에서는 완전하게 행복한 그 느낌을 너무도 절묘하게 표현해서 그 감정이 연주자의 몸으로 느껴질 정도예요! 그와 동시에 슈만은 '완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한 번쯤 '완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지만 어른이 되면서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므로 완전한 행복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잖아요?


어린이 정경에서 특히 감동을 받으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너무도 자유롭고 심오한 작품이면서 아주 복합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들한테는 특유의 광채(radiance)가 있고 나이가 들면서 곧 사라지는데, 슈만은 자신만의 시정을 통해 우리가 그러한 광채를 살짝 느껴볼 수 있게 인도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슈만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슈만은 이처럼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어요.
어린이 정경은 내향적인 작품입니다. 슈만은 악보를 클라라에게 보내면서 '당신이 비르투오조라는 사실을 잊어야 연주할 수 있을 거야'라고 적기도 했고요. 이 작품에 담긴 정서는 복합적이고 또 모순적입니다. 위대한 걸작인 이유가 거기에 있죠.


어린이 정경을 재녹음하기 원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대에 자주 올리는 작품인데도 연주할 때마다 그 안에서 더욱 풍부한 감정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어린이 정경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클라라 하스킬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특히 여류 피아니스트들의 음반이 많아 놀라게 되는데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볼 때 슈만의 음악은 여성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어린이 정경뿐 아니라 슈만의 음악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클라라를 염두에 두고 쓴 곡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어떤가요?
어린이 정경이 제가 중국에서 음악 교육을 받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라면,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제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 익히기 시작한 주요 작품이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주하고 있습니다. 슈만이 자신의 내면을 가장 온전하게 열어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보시나요?
작곡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당시 슈만은 기존 체제에 전투적으로(심지어는 혁명적으로) 저항하는 데 몰두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피상적이거나 반동적인 작곡가들을 상대로 다비드동맹과 지속적인 기고를 통해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어요. 그는 위대한 시정이야말로 다시 음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동시에, 클라라의 마음을 드디어 사로잡는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슈만은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 세상에 보여주려 했고 그 결과 갖가지 정서와 감정을 만화경처럼 담은 매혹적인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제 생각에 슈만은 이후 작품에서는 이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은 것 같아요...


작품번호가 겨우 6인데 말이죠!
그게 바로 슈만의 미스터리입니다. 슈만은 첫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이미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어요. 음악 역사상 유례 없는 경우죠. 다비드동맹 무곡집은 슈만 버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바흐가 50이 넘어서야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출판한 반면 슈만은 겨우 27세에 다비드동맹 무곡집을 펴냈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얘기가 나왔으니, 바흐가 슈만에게 미친 영향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저는 슈만이야말로 최고의 바흐 후계자, 아니면 적어도 가장 독창적인 바흐 후계자라고 생각합니다. 슈만은 꿈과 시정으로 가득찬 작곡가였어요. 우리의 다양한 생각들은 꿈 속에서 서로 뒤엉키기도 하고 일부는 사라지기도 하고 일부는 전면에 있다가 저 뒤편으로 혹은 그 반대로 옮겨 가기도 하잖아요? 슈만은 이처럼 여러 층의 의식의 흐름을, 바로 바흐에서 시작된 위대한 폴리포니의 전통 위에서 그려낸 겁니다.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다비드동맹 무곡집의 Zart und singend(부드럽고 노래하듯이)를 보면 3성부로 되어 있는데요, 슈만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마음에 곧장 와닿는 선율, 역시 단순한 형태로 곡의 구조를 지탱하는 베이스가 있고, 그 배경에는 또 꿈 속을 떠돌며 말을 거는 마음 속 무의식의 목소리가 내성부의 형태로 들어 있습니다.


작품번호 20인 후모레스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별도의 오선에 '내성부'를 표기하고 연주는 하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죠...
맞아요, 감동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일이죠.
제가 볼 때 이러한 내성부(들)이야말로 슈만 음악의 정수입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기 위한 열쇠는 바로 바흐에게 있고요.


어린이 정경, 다비드동맹 무곡집을 비롯해 슈만의 많은 작품들이 여러 '소품'의 모음집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 점이 연주자에게 어떤 어려움을 안겨주나요?
아무래도 청중들이 계속 집중하도록 유도해서 음악 속에서 '길을 잃거나' 작품이 조각난 것처럼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렵죠. 그렇게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곡들 사이의 휴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각 곡을 구분하는 정적에는 각자 고유의 스토리와 긴장이 있기 때문에, 전부 일정해서는 안 되고 아주 짧은 휴지부터 상당히 긴 사색의 시간까지 다양한 모습을 취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러한 작품들에서 일관성의 열쇠는 바로 각 개별 곡을 구분하는 정적에 있어요. '완전한 채움'을 가능케 하는 '빈 공간'인 셈이죠.


어린이 정경, 다비드동맹 무곡집 외에 또 각별히 좋아하는 슈만 작품은 어떤 게 있나요?
환상과 시정을 가장 여과없이 드러내는 환상소곡집 Op. 12와 환상곡 Op. 17을 들고 싶습니다. 제목부터 감성을 자극하죠. 이 네 작품은 모두 피아니시모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어요. 곡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종결됐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고 계속 꿈꾸게 하기 위한 슈만의 의도가 절묘하게 반영돼 있습니다.


결국 슈만 자신이야말로 '시인이 이야기하는'[어린이 정경 마지막 곡 제목] 셈이군요.
물론이죠. 시적인 음악을 창작한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인터뷰 진행: 미셸 몰라르
영어 번역: 찰스 존스튼
한국어 번역: trammon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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