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5 07:53

[아끼는음반 14] 슈만 카르나발: 모이세비치, 에고로프 아끼는 음반/음원

카르나발(카니발; 사육제)은 슈만이 25세에 완성한 21곡 짜리 모음곡으로, 결혼까지 약속했다가 헤어진 17세 소녀 에르네스티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밑바탕에 두고 다양한 광대들, 슈만 자신의 분신인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 클라라, 쇼팽, 에르네스티네, 파가니니, 다비드동맹 등 다양한 인물과 대상을 묘사한 음악적 가장 무도회입니다.




코르토처럼 곡의 가능성을 다채롭고 개성적으로 펼쳐보이면서도 idiosyncrasy가 부담스럽지 않고 음질도 양호한 모이세비치가 저의 첫 번째 선택입니다. 71세였던 1961년 아메리칸 데카 레이블로 뉴욕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나 2011년 DG에서 리스트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아라우, 라로차, 레벤탈, 모이세비치, 페트리의 CD화되지 않은 녹음을 모아 10장짜리 세트로 발매할 때까지 CD화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보니 기제킹을 연상시키던 젊은 시절의 민첩한 핑거링은 한풀 꺾였고 빠른 패시지에서 시원스레 질주하는 쾌감도 1%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악구의 표정이 효과적으로 살아있고 페이스 조절이 절묘해서 음악이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흐릅니다. 강약과 템포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때로는 즉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순간적으로) 변화시키고 도돌이표를 종종 자의적으로 처리하는데도 전체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 듣다보면 27분이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처음 이 음반 샀을 때 앉은 자리에서 이 카르나발 연주만 내리 4번을 연속으로 들었어요.

세부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워낙 많은데, 얼른 생각나는 것만 해도 삐에로에서 지속적으로 교차되는 p(p)-f 음형과 ASCH-SCHA에 거듭 등장하는 E플랫 sf를 미묘하게 변화시킨다든지, 아를레킨에서 고귀한 왈츠로 그리고 쇼팽에서 에스트레야로 넘어갈 때 휴지 없이 마치 한 곡처럼 연결시킨다든지, 제8곡(응답)에서 오른손 멜로디를 한 옥타브 아래 왼손이 반복할 때 또렷하면서도 위화감 없이 노래한다든지, 간주곡 파가니니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에스트레야의 존재감이 확실하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또 저는 오이제비우스와 쇼팽이 이토록 고즈넉한 연주를, 그리고 곳곳에 등장하는 왈츠 리듬이 이렇게 은근히 맛깔스런 연주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어요.

강추합니다!

카르나발 전곡 - 베노 모이세비치 (1961년 녹음)



*** 모이세비치의 슈만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환상소곡집 Op. 12 중 제3곡 Warum?(왜?)인데요. 사실 전체 8곡 연주를 놓고 보면 엠마누엘 액스의 1981년 녹음이 훨씬 매력적이지만 Warum에 한해서라면 모이세비치의 1952년 녹음이야말로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모든(!) 피아노 연주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특별한 순간입니다. 3성부가 쓸쓸히 주고받는 멜로디와 무심한 듯 세심하게 반복되는 왼손 반주가 모이세비치의 마법처럼 절묘한 강약과 템포 조절을 타고 3분간 꿈결처럼 펼쳐지는데, 각자 고유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결국 완벽하게 합치되는 4개의 악기를 듣는 듯한 환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6:50부터) 환상소곡집 Op. 12 중 제3곡 Warum? - 베노 모이세비치 (1952년 녹음)





다시 카르나발로 돌아와서...


키신이나 아믈랭 같은 명쾌하고 시원스런 스타일의 카르나발이라면 선배인 에고로프의 1981년 녹음을 추천할만합니다. 폴리니의 쇼팽 연습곡을 연상시킬 만큼 명징한 음색과 철두철미한 테크닉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특히 첫 곡과 마지막 두 곡에서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쾌속 질주하면서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터뜨리는 쾌감은 달리 비할 데가 없습니다. 모이세비치의 위 연주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제일 자주 듣던 카르나발이었어요. 단, 상상력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이른바 슈만다운 재미가 덜하고 특히 셈여림의 폭이 단조로운 편이라 퍽 아쉽습니다(과장을 보태면 어떤 곡들은 p와 ff 밖에 들리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폭포수 같은 시원스러움만큼은 여전히 최고입니다.

제19곡 휴식 - 유리 에고로프 (1981년 녹음)

제20곡 필리스티아인에 맞서는 다비드동맹의 행진 - 유리 에고로프 (1981년 녹음)





마지막으로...
"빠른" 카르나발을 찾는 분들에게는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유명한 1929년 녹음만한 게 없습니다. 워낙 빨리 전개되면서 전곡을 23분만에 주파하다보니 시원하다기보다는 숨가쁜 느낌이죠. 느린 곡에서마저 플로레스탄의 에너지가 오이제비우스를 압도해버리는 듯한 연주입니다.

카르나발 전곡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929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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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명품추리닝 2018/10/28 02:01 #

    오오... 71세에 이런 연주를 하다니 놀랍고 존경스러워요.
    영재가 평생 재능을 갈고 닦으면 이와 같은 대가가 되는 거겠죠.
    저는 연습할 때 벌써 테크닉이 녹스는 것 같아 걱정인데요.
  • trammondog 2018/10/28 09:55 #

    재능에 꾸준함이 합쳐져 이런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도 놀랍고,
    이런 연주가 CD 시대에 들어선지 30년 넘도록 음반사들의 관심을 못 받은 것도 의외였어요.
    명품추리닝님도 시간과 함께 테크닉이 살짝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대신 더욱 풍성한 삶의 경험과 생각들을 녹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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