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1 06:52

[아끼는음반 11] 루이 암스트롱 초기 녹음들 (1925-1930) 아끼는 음반/음원

(원래는 세 차례 정도로 나누어 포스팅할까 하다가 그렇게 시작하면 제 게으름 때문에 중도에 멈출 것 같아,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히는 1930년 이전까지만 한 번에 정리해 봅니다. 아래 사진들 가운데 음반 내지를 제외하고는 뉴올리언즈 재즈 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것입니다.)


1) 출생부터 1930년까지:

루이 암스트롱은 1901년 8월 4일 뉴올리언즈에서 매춘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 메이앤(당시 15세)과 책임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던 아버지 윌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 자신의 생가를 다시 찾은 루이)


아버지는 루이가 태어난지 몇 주 되지 않아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루이는 처음 몇 년은 외할머니 손에서 컸습니다. 곧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 여동생 마마 루시(아버지와 어머니가 잠시 화해했던 1903년에 태어남)와 함께 살게 됐으나, 극심한 가난 속에 이미 6-7세때부터 거리에 나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1세였던 1912년 12월 31일, 어머니의 "고객"이자 "의붓아버지" 중 한 사람이 놓고 간 권총을 가지고 거리에 나가 공포탄을 발사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어 Colored Waif's Home for Boys라는 소년원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곳 브래스 밴드에서 Peter Davis의 가르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코넷을 불기 시작합니다. 루이가 "Me and music got married at the home"이라고 회상할 만큼, 이 시절은 루이가 음악과 코넷에 대한 열정을 처음 싹틔우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됩니다.

(소년원 시절 불던 코넷. 1965년 피터 데이비스와 다시 만난 루이)


출소 후 싸구려 술집, 사창가 등에서 연주를 시작했으나 음악으로만 생계를 이어갈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루이는, 석탄을 배달하고 기둥서방으로도 일하고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기를 주워다가 상한 부위만 도려내고 양념에 재워 식당에 팔면서 여전히 극빈한 삶을 이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뉴올리언즈 음악인들 사이에서 서서히 실력을 인정 받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1918년 후반부터는 전업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1922년, 루이는 우상으로 여기던 Joe "King" Oliver의 부름을 받고 시카고의 Creole Jazz Band에 제2코넷으로 합류하면서 보다 큰 도시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합니다. 당시 루이의 실력은 이미 킹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고 있었고 그 격차는 밴드 내외의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던 루이는 킹에 대한 존경과 위축 때문에 제2코넷에 안주하고 있었죠. 이 때 루이가 밴드를 떠나 독립하도록 등을 떠민 것이 바로 밴드의 피아니스트이자 곧 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 Lil Hardin Armstrong입니다.

(1923년 크리올 재즈 밴드. 중간부터 오른쪽으로 루이, 킹, 릴)


릴은 자신이 이름을 떨칠 만큼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지만, 수동적인 루이가 1924년 킹의 밴드에서 나와 자신의 기량과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부추기고 그 결과 재즈 역사상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1925-30년의 Hot Fives & Hot Sevens 녹음의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재즈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릴은 루이가 주인공이 되고 그의 이름이 어디서나 맨 위에 큼지막하게 적히기를 원했습니다. 시카고의 유명 클럽이 "The World's Greatest Cornet Player"라는 홍보와 함께 루이를 세우도록 계약한 것도, OKeh에서 핫 파이브와 핫 세븐 녹음이 이루어지도록 앞장서서 레코드사와 접촉한 것도 모두 릴이었죠.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 금이 가고 릴은 오래 전 중단했던 클래식 피아니스트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재즈계를 떠났지만, 루이의 경력 그리고 더 나아가 재즈 역사의 꽃을 피운 데에는 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926년 루이 암스트롱의 핫 파이브. 가운데 세 명은 왼쪽부터 Johnny St. Cyr, Johnny Dodds, Kid Ory)


1927-1928년 무렵 릴이 떠나면서 피아니스트로 합류한 것이 바로 유명한 Earl Hines입니다. 릴이 착실한 반주자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실험 정신 그리고 탁월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얼은 루이와 서로의 예술적 영감을 끊임 없이 자극했으며, 이 시기 루이는 재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연주들로 꼽히는 Potato Head Blues, West End Blues 등 걸작을 줄줄이 탄생시키게 됩니다 (아래에 유툽 클립 링크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루이의 녹음들은 흑인 전용 상점에만 배포되는 소위 "race records"로만 발매되고 있었는데, 이 무렵 오케 레코드사의 뉴욕 지역 레코딩 디렉터였던 Tommy Rockwell은 루이의 음악이 백인 소비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것으로 판단하고 1929-1930년 사이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소규모 밴드뿐 아니라 보다 "세련된" 대규모 오케스트라와도 수 차례의 녹음 세션을 진행합니다. 이 레코드들이 시카고와 뉴욕 그리고 타 지역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루이는 인종의 벽을 넘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로스앤젤레스에도 진출하게 되죠. 대략 여기까지가 1930년까지의 요약입니다.

(루이가 1965년경부터 연주한 마지막 트럼펫.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완전히 전환한 것은 1926년 Fletcher Henderson 밴드에서 잠시 활동할 당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식 사랑도 남달랐던 루이)


2) 뉴올리언즈:

(재즈 박물관에서 프렌치 마켓쪽을 바라본 모습)

(독특한 분위기의 샵들이 많은 세인트 피터 스트리트)


음악 + 음식 + 섹스 + 축제. 뉴올리언즈는 미국 내 유명 관광지 중에서도 아마 가장 개성 강하고 호불호도 크게 갈릴 것 같은 곳입니다. 소위 Deep South로 불리는 지역에서도 eccentric한 존재감이 있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뉴올리언즈는 인종 차별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다른 남부 주들과는 달리 흑인에 대한 핍박이 극심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뉴올리언즈 흑인들이 주 경계를 넘어 바로 옆 미시시피를 방문하고는 헬게이트에 들어간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는군요). 한 예로, 백인 농장주가 흑인 여성 노예와 잠자리를 하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뉴올리언즈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같은 관계가 보다 공개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였으며, 이렇게 프랑스 또는 스페인 계통 백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혈통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소위 크리올)은 아버지에 의해 공식적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미국 최초의 본격적인 흑인 중산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들 크리올은 백인들로부터는 엄연히 흑인으로 차별 대우 받으면서도 자신보다 피부가 검은 흑인들을 업신여기며 스스로를 프랑스나 스페인 혈통의 우월한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루이도 1922년 뉴올리언즈를 떠나기 전까지는 이들로부터 종종 무시를 당하곤 했는데, 그의 4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인 루실의 증언을 보면 루이는 루이로 불리는 것을 개의치는 않았지만(1933년 발표한 Laughin' Louie라는 노래도 있죠) 자신은 프랑스인이 아닌 미국인이라면서 실은 루이스로 불리는 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Hello Dolly의 시작 부분에 나오듯요).


3) 음악적 성취:

아래 각각을 떼어놓고 보면 재즈의 발전 과정에서 결국은 누군가에 의해 일어났을 거라 생각되지만 루이는 이 모든 것을 대략 1925-1928년 사이에 한꺼번에 선보였고, 그 즉시 수많은 재즈 음악인들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재즈 역사상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A. 독주 악기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초기 재즈 밴드의 구성은 5-8개 정도의 악기로 이루어진 합주협주곡에 비유할 수 있는데, 루이 이전에는 합주와 앙상블에 치중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루이가 등장하면서 각 악기가 돌아가며 솔로의 매력과 임프로비제이션을 선보이는 형식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물론 루이 자신의 트럼펫이 가장 주인공이었지만 다른 악기들도 돌아가며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루이의 솔로 임프로비제이션은 선율에 약간의 꾸밈음이나 리듬을 덧붙이던 기존의 수준을 탈피하여 화성을 기반으로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흐름과 발전이 있는 변주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Potato Head Blues. 1927년 5월 10일 녹음. 특히 1분 49초부터 스탑 타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루이의 트럼펫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솔로 중 하나로 꼽히곤 합니다. 비르투오조들이 넘치는 현대의 기준에서는 소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충격적인 연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너도나도 앞다투어 모방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B. 초인적 연주력:
밀도 높은 음색과 폭넓은 음역을 바탕으로 힘과 부드러움과 낭랑함 그리고 클라리넷 같은 현란함까지 두루 뽐내는 루이의 트럼펫은, 루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십대 시절부터 카루소, 갈리 쿠르치, 테트라치니, 맥코맥 등을 애청하며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바이올린의 고음 하모닉스를 덧붙인 듯한, 때로는 트릴처럼 들리기도 하는 특유의 비브라토도 루이임을 드러내는 개성 중 하나죠. 하지만 독학으로 익히다시피 한 자신만의 극단적인 앙브로슈어로 인해 윗입술이 자주 찢어지고 이 때문에 연주 생활에 큰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West End Blues. 1928년 6월 28일 녹음. 곡의 첫 문을 여는 주옥같은 트럼펫 솔로가 이 곡의 트레이드마크지만, 저에게는 곡 거의 종반에 피아노 솔로를 이어받은 트럼펫이 하늘로 솟아올라 11초간 찬란하고 우아하게 활공하는 B플랫음이야말로 제가 들어본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악기 소리입니다. 빌리 홀리데이는 중간에 클라리넷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루이의 나긋나긋한 스캣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죠. 또한 이 녹음에선 얼의 반짝이는 피아노 솔로도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입니다.)

C. 노래:
루이만큼 전세계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각인시킨 사람이 또 있을까요? 굳이 따지자면 노래가 자신의 첫 번째 장기가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루이는 그 특유의 raspy함, 탄력적인 프레이징과 비브라토로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처럼 구사했으며, 또한 스캣을 최초로 녹음하고 확산시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Heebie Jeebies. 1926년 2월 26일 녹음. 스캣이 최초로 녹음된 노래입니다.)


(After You've Gone. 1929년 11월 26일 녹음. 이런 스윙은 타고나야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휴, 글이 엄청 길어졌네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혹시 계시다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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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명품추리닝 2017/12/21 23:07 #

    저요, 저. 끝까지 잘 읽었어요.
    뉴올리언즈부터 재즈 포스팅 연재하시는군요.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좋은 주말 되세요~
  • hammondog 2017/12/21 23:51 #

    길고 두서 없는 포스팅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래그타임 출현부터 1920년경까지, 루이의 창작열이 폭발했던 1930년경까지, 그 이후, 이렇게 나눠서 써볼까 했는데 일단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또 게을러질까봐 루이에 관한 내용만 썼어요;
  • Mirabell 2019/07/30 14:10 #

    음악에 조예가 있으신 분이셨군요. 우물안 개구리라 매일 듣는 음악만 듣는데 먼저 제 블로그를 찾아와주시는 덕분에 이런 글에 음반 이야기까지 얻게되는 행운까지 얻네요. :)
  • trammondog 2019/07/31 12:16 #

    나름 열심히 써서 올렸던 글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관심 갖고 듣는 장르나 작곡가, 연주자가 딱 정해져 있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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